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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고양이와 함께

Series/길고양이

by SOURCEof 2023. 1. 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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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스에 어떤 글을 기고하면 되느냐는 물음에, 비인간동물과 인간동물이 서로를 반려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대답을 듣고 나는 지난 시간 나의 ‘반려’ 에 대하여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는 그야말로 마음의 반쪽이었던, 사랑스러운 두 명의 고양이가 있었다. 나무와 키키. 그들은 부산 동래의 재개발 지역에서 구조된 모녀지간의 고양이들이었다. 

 

 재개발 공사 과정에서 발생한 유해물질들로 인해 전염병을 얻은데다, 콘크리트와 철근더미 속에서 용역들을 피해다니며 부상을 입고 주거지역마저 잃어버린 동래구의 고양이들. 그들은 당시 재개발 지역에서 거주하던 주민분이 개인적으로 구조를 맡으신 덕에 임시 마련된 주택의 작은 쉼터로 이동되었다. 얼굴도 모르던 사이였던 나와 자원봉사자들은 고양이들을 인연으로 만나 돌아가며 그곳을 관리했다. 당시 나는 쉼터에서 거주를 하며 돌봄노동을 했다. 그리고 짐을 빼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나무와 키키를 입양하여 함께 삶을 꾸려나가기로 결심했다. 서열이 거의 마지막이었던 탓에 다른 고양이들의 텃세에 밀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려 떠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쉼터에서 지낼 때 나무의 모습>

 

 

 재개발 지역의 고양이들은 어릴적부터 사람의 손에 익숙하게 자라온 집고양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람만 보면 하악질을 하거나, 사람 목소리가 들릴때는 아예 꽁꽁 숨어 모습을 보이지 않기도 했고, 사람이 주는 간식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들이 태어나 살던 곳은 길이었고. 편안하게 여기는 곳도 길이었고.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하기에 위험해도 이들이 돌아가야 할 곳도 길이었다. 쉼터는 그들이 다시 길로 돌아가기 이전에 잠시 머무르는 곳에 불과했다. 하지만 고양이들이 돌아가야 할 곳을 무너뜨리고, 없애버리고, 병균과 철근무더기로 만들어버린 것 또한 인간이었다. 계속해서 생명들을 죽이고, 내쫓고, 변두리로 몰아버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가난한 영혼을 지우며 삐까번쩍한 아파트를 세우는 것 또한 인간이었다. 

 

이 모든 영문을 모르고 그저 두려움과 원망으로 가득 차 우리를 바라보는 눈동자들 앞에서,  속상한 사정을 이야기하며 제발 마음을 열어달라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나무와 키키도 그런 고양이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나무가 다른 봉사자들과 달리 내게는 호기심을 보여주고, 단 둘이 있을때에는 놀이까지도 가능하게 된 순간에서 우리는 희망을 찾았다. 너무나 다행히 적응하는데 꽤 시간은 걸렸지만 나무도 키키도 쉼터에 있을때보다 집으로 오자 활력이 조금씩 생기고 밥도 잘 먹게되었다. 그렇게 1년. 2년. 시간이 흐르고  빼빼 말랐던 두 고양이가  비만 고양이가 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나무와 키키가 지닌 사람에 대한 트라우마였다.

 

 

<왼쪽이 딸 나무, 오른쪽이 엄마 키키>

 

 아마도 재개발 현장에서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용역들, 통덫을 이용해 구조될 때의 트라우마가 강하게 작동하던 것이리라. 몇 년이 지나도록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나무와 키키를 볼때마다 나는 혼자 안달이 났다. 무서운 존재와 한 집에 있느라 얼마나 힘들까. 미안한 마음에 더 이 방법 저 방법 할 수 있는 것은 죄다 시도했던 것 같다. 각종 ‘사회화’에 좋다는 장난감은 다 써봤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우리 사이가 더 멀어지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특히 키키는 유독 나를 무서워했다. 늘 가까워지지 못하고 1m거리에서 키키를 바라봐야만 하는 것이 유독 속상한 날이면, 왜 진심을 몰라주는 것인지. 왜 잘못없는 이들의 마음에 그렇게 깊은 상처가 패인 것인지.  내가 더 해줄 수 있는게 없어 엉엉 울기 일쑤였다.

 

 그러다 어느날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이게 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나무와 키키에게 섣불리 다가가려는 나의 욕심이었다는 것. 가끔은 가깝게, 가끔은 멀게.  기다림의 시간을 충분히 갖기로 다짐, 또 다짐했다. 그렇게 우리 사이 리듬이 맞춰지며 다시 시간이 흘렀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의 선택을 존중하는 일

그러다, 어느 여름날 밤의 일이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지면을 다 할애할 수 없으니 간단하게 서술하자면, 그날 나무와 키키는 방충망 문을 자신들의 발톱을 사용해 열고 집을 나갔다. 나는 다시 그들을 집으로 들이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애를 써봤지만 실패했다. 

 

 나무와 키키가 집을 나간 것을 알고, 이미 많은 이들이 나에게 ‘고양이 유기범’이라며 쉽게 욕을 쏟아내곤 했다. 하지만 내가 당시에 얼마나 많은 방법으로 나무와 키키를 다시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지 더 이야기하려고 노력하지 않겠다.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이제 나는 내가 유기범이 아니라는 변명을 댈 시간에, 내가 나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된 지금의 모습은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또 고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처럼 통덫이라도 놔서 나무와 키키를 다시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나무와 키키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덫을 두어 잡아온다면 이미 가지고 있었던 사람에 대한 트라우마가 더 심해져, 길에서 사람들이 주는 밥까지 거부할 것 같았다. 이미 가진 상처가 많은 두 고양이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매일 좋아하던 습식을 집 앞에 두었고, 나무와 키키는 이따금씩 우리 집 앞에 밥을 먹으러 오곤 했다. 나는 덫을 두는 대신 늘 문을 조금 열어두어 나무와 키키가 집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해 두었다. 나무와 키키는 춥고 배고프고 위험한 길 생활도, 매일 밥을 먹고 따뜻하게 잘 수 있는 실내생활도 경험해본 고양이들이다. 언제든지 나무와 키키는 실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나는 나무와 키키가 집으로 들어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길에서의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어느날,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늘, 내가 주는 밥만 먹어야 하고, 내가 제공한 공간에서만 돌아다닐 수 있고, 내가 주는 장난감만을 가지고 놀아야 하는 나무와 키키의 삶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과 미안함을 느꼈다.  언제든 문을 박차고 나가 원하는 것을 먹고 보고 즐길 수 있는나에 비해,  내가 사랑하는 나무와 키키는 무엇을 원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알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이, 처음으로 강한 의지로 내게 외치는 것 같았다. 벤토나이트가 아니라 흙바닥에 똥을 싸고 싶고, 장난감이 아니라 풀과 벌레를 사냥하고 싶다고. 비록 몸에 좋지 않은 밥일지라도, 내가 집에 올 때를 기다리지 않고 원할 때 식사하는 삶을 원한다고.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방식이었다고. 그리고 지금껏 아주 애써 회피하고 싶었던 사실을 나는 직면할 수 있었다. 나무와 키키는 한번도 나와 살고싶다고 선택한 적이 없었다고. 나무와 키키라는 이름이 좋다고 말해본 적도 없고, 그보다 더 이전에 구조되고 싶은지 아닌지조차 선택할 수 있는 권한조차 없었다고.

 

 그것은 흙 투성이가 된 나무와 키키가 평화로이 맞은편 집 지붕에 누워서 햇볕아래 낮잠을 즐기는 모습을 보았을 때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깨달은 것이었다. 나에게는 저들의 자유를 빼앗을 권리가 없다. 인간이 생각하기에 위험하다고 해서, 감히 덫을 놓고 속여서 다시 우리 집으로 가둘 당위성을 나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맛있는 것을 해주고, 잘 놀아주고, 포근한 이불을 깔아준다고 해도. 내가 사람인 것은 바뀌지 않기 때문에 불편했던 것이다. 더 이상 사람 눈치 보면서 살지 않아도 되는 삶, 전처럼 흙을 밟고 풀냄새를 맡고 여기저기 쏘다닐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진정 내가 나무와 키키를 사랑한다면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생각했다.  

 

밥을 굶지 않을까, 병에 걸리지 않을까, 차에 치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길동물들이 안전하게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든 인간들의 몫이다. 나무와 키키를 사랑한다면. 정말 안전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을 집에 가둬놓고 이름뿐인 ‘보호’를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길에 사는 동물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싸우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들의 아파트>에도 이런 재개발 현장의 고양이들이 나온다.

 

주민들이 재건축현장의 고양이들을 위한 ‘고양이 이주 프로젝트’를 실행하지만, 결국 영역동물인 고양이들은 위험천만한 재건축 현장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주민들은 공사현장으로 사료배달을 간다. 그리곤 이렇게 말한다.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계속 살고 싶냐고." 아마 고양이들의 대답은 “ 왜 떠나야 하는지 모르겠다” 가 아닐까.

 

고양이들에게 자신들이 살던 곳이 인간의 이익논리로 인해 갑자기 ‘재개발’ 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삶 자체가 파괴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떠나지 않으려는 자들과 침범하려는 자들. 자본의 논리 앞에서 살 곳을 잃어버리는 풍경이 너무 자연스러워져 버리는 시대다. 예민함을 곤두세우고, 모든 감각을 활짝 열어서. 우리가 무심결에 거니는 아스팔트 바닥조차도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라는 것을. 그래도 마땅히 안전해야 할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글쓴이: 달연

이것저것 해방운동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삶에 확신이 없어 자기소개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밴드 낯선무화과와 타투 작업을 겸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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