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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가 아니라 ‘대학살’

Contents/Reconceptualizing | 새로운 관점

by SOURCEof 2023. 4. 1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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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9일 제주시 애월읍 신도리 양돈장에서 불이 났다. 그리고 돼지 880명(命: 이 글에서는 비인간 동물도 목숨이 있는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마리’가 아닌 ‘명’으로 표기하고자 한다)이 불타 죽었다. 관련 기사를 찾아보았다. 

 

“피해금액 3억 8000만 원 이상 추정” 

(매일경제, 23.03.29)


“제주 양돈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800마리가 넘는 돼지가 폐사했다.” 

(매일경제, 23.03.29)


“다행히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뉴스제주, 23.03.29)

 

여러 기사들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 문장들이다. 본 글에서는 위 문장들이 비인간 동물, 그중에서도 농장동물의 죽음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기사에서는 돼지들이 왜 구조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정황이나 원인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은 구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양돈장을 비롯한 농장 동물 사육장에서 불이 나면 그저 죽는 것, 즉 ‘폐사’가 농장동물의 운명이다. 모두가 당연시한다. 왜일까?

 

 

 

 

양돈타임즈에서는 근래 증가한 국내 양돈장 폐사율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90년대 국내 양돈장 모돈 폐사율은 1~2%에 불과했던 반면에 2021년에는 6~7%를 넘기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고, 심지어 10%를 넘기는 농장도 있다고 강조한다. 이 기사는 증가한 폐사율로 인한 “생산성 개선 차질”과 “경제적 손실”을 중대한 문제로 꼽는다.

 

“모돈 폐사율은 은행이자율보다 더 무섭게 생각하고 경계해야 할 생산지표라고 여겨야 한다. 이자율 0.5% 상승에도 시장경제가 흔들리는 모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명백하다. 농장 동물은 위험에 처할 때 안전이 보장되고, 구조되어야 할 ‘생명’이 아니며, 화폐 가치를 창출할 ‘사물’이나 다름없다는 것. 그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 ‘폐사’될 수밖에 없는 것. ‘경제적 손실’은 괜찮지 않지만 농장 동물 그 자체는 ‘폐사’되어도 괜찮은 것, ‘폐사’의 결과는 모두 경제적 손실로 표현될 뿐이다. 또 그들을 구조하는 것이 그들이 ‘폐사’되는 것보다 더 큰 경제적 손실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농장 동물을 구조하려는 시도는 애초에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굳이 누가 화폐 가치를 잃은 ‘사물’을 구조하려고 들겠는가? 귀하디 귀한 돈까지 써가면서? 우리는 생명보다 돈이 먼저인 세상에 살고 있다.

 

 

 

 

더불어 ‘폐사’라는 단어가 내 눈길을 끌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폐사(斃死)’는 “주로 짐승이나 어패류가 갑자기 죽음”으로 인간 동물의 죽음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정의된다. 이는 그들의 죽음이 마땅히 애도되어야 될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화폐 가치를 잃은 사물의 폐기에 가깝다는 사실을 함의하고 있다. ‘죽음’이 아닌 ‘페사’라는 단어의 존재 자체는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자는 우월한 것으로, 후자는 열등한 것으로, 왜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기꺼이 애도하고 슬퍼할 ‘죽음’이라고 명명하지 못하는가? 아니, 명명하지 않는가? 

 

물론 제목에 ‘떼죽음’이라고 쓰인 기사들이 존재하긴 하다. 하지만 인간 동물에게 ‘떼죽음’이라는 말을 쓰는 일은 거의 없지 않은가? 우리는 비인간 동물의 죽음을 너무도 낮추어 대하고 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문장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격차. 그 격차에서 나는 돼지들이 비명소리을 듣는다. 그들이 불에 타 죽어가며 느꼈을 통증을 감히 가늠해본다.

 

공장식 축산에서 태어나 한 번도 햇볕을 쐬지 못하고 땅을 밟고 코로 흙놀이조차 해보지 않은 돼지들을 혼자라도 그려본다. 애도의 기도를 올려본다. 눈물이 맺힌다. 그들은 결코 사물이 아니다. 생생하게 살아 숨쉬었을 생명이다. 그러나 분하게도, 작금의 상황에서 한 명 한 명 고유한 돼지들의 고통스럽고 억울한 죽음은 잊힐 것이고, 같은 죽음은 반복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애도되지 못했고 그저 쓰레기차에 실려 어딘가에 짖밟히고 파묻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신도리뿐만 아니라 전국적,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는 농장동물의 죽음은 “폐사”가 아니라 인간 동물이 저지른 “대학살”이다. 무수한 생명들이 좁디좁은 번식용 혹은 사육용 스톨에 갇혀, 고통스럽게 목숨을 잃은 “대학살”을 두고 경제적 손실을 논하는 기사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다행히 880명의 돼지의 생명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문장을 절실히 보고 싶다.

 

다음 달에 이어질 글에서는 농장동물 “폐사” 사건의 근본적 원인과 그에 따른 한국 동물보호관리시스템의 정책을 살펴보고자 한다. 농장동물은 우리 종차별적 사회에서 어떻게 ‘관리’되는지 자세히 알아보고 그 속의 맹점과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글쓴이: 토란

책에 파묻혀 사는 비건 퀴어 에코 페미니스트.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사랑스러운 존재들과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 존재의 평화를 바라며 글을 읽고 쓰고 목소리 내고 있습니다. 현재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제주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평화, 동물권, 페미니즘, 환경, 퀴어 등 온갖 경계를 넘나드며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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