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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있는 동물은 먹지 않아요”에서 한 걸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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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RCEof 2023. 3. 16.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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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있는 동물은 먹지 않아요”

 

영화 <파니핑크>(1995)에 나오는 대사다. 주인공 파니 핑크는 눈이 있는 동물을 음식으로 먹는 것은 왜인지 꺼림칙하게 느껴진다며 채식을 한다. 엄격한 비건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그녀는 “음식”에서 “동물”의 눈을 떠올리는, 정확히 말하면 그 “음식”에도 눈을 포함한 얼굴이 있었음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이 대사를 계기로 많은 분들이 채식 혹은 비건을 시작한 사례를 종종 들어보았다. 식탁에서 “음식”이 아닌 “동물”의 얼굴이 떠오르고, “고기”가 아닌 “동물 사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즉, 동물이 태어나서 도살되기까지 피할 수 없었던 고통과 공포가 새겨진 눈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타자의 눈, 확장해서 말하자면 얼굴을 마주한 이들은 더 이상 타자의 고통을 보고 쉬이 지나칠 수 없게 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말했다. ‘나는 다른 사물을 인식하듯 타자를 인식할 수 있고, 타자를 수단으로 이용하고 소유할 수도 있다’고.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육식을 포함한 동물 학대를 하는 사고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중요한 주장은 다음과 같다.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은 살인하지 말라고 나에게 명령한다.” 타자는 나보다 나의 주인처럼 내가 행동하기를 명령하고 나는 그 명령을 피하지 못한다. 타자의 얼굴은 자신의 연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나를 죽이지 말라’고 간청하기에 우리는 그 얼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비록 우리가 원치는 않았지만 어느 순간 관계가 생성되고, 이 관계 맺음에서 우리는 얼굴로부터 우리 밖의 죽음은 물론 우리의 죽음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타자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자기 자신보다 더 걱정하게 된다. 미래는 오로지 이런 방식으로만, 타인이 누릴 삶으로만 나에게 찾아온다. 곧 타자는 미래이다. 레비나스는 타자가 요청하는 무수한 책임을 감당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지금껏 타자의 얼굴을 조우하고, 그들과 공명했을 때가 하나둘씩 떠올랐다. 폭력에 노출된 여성, 자살을 고민하던 혹은 자살한 성소수자 친구, 서울역 차가운 바닥 위 노숙자,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 자신을 피하는 시선에 위축된 흑인, 바다 위 위태롭게 흔들리는 보트 위 난민, 전쟁의 한복판에서 절규하는 어린이, 이동권 투쟁을 하는 장애인, 성폭력을 당했음에도 도움을 구하지 못하는 성 노동자, 도살장으로 향하는 트럭 속 비인간 동물 등등… 무수히 많은 이의 얼굴들. 그들은 나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명령하고 있었다. 응답하라고, 행동하라고, 변화하라고. 그런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새 타자는 나의 미래가 되어 있었다.

 

 

 

 

‘비질(Vigil)’ 활동으로 도살장에 간 날이 떠오른다. 그때 처음 보았다. 도살장으로 향하는 살아 있는 돼지, 소, 닭의 모습을. 식탁 위에서는 언제나 그들의 신체 조각만을 보았다. 물론 얼굴을 제외한. 내가 비질에서 목격한 그들의 얼굴은 고기가 되기 위해서만 태어나 살아있음의 고됨을 담고 있었다. 그동안 겪어온 통증이 온몸에 새겨 있었다. 그리고 죽음이 코앞에 있음을 육감으로 알고 있었다. 가까이서 다가오는 동족의 비릿한 피 냄새를 맡으며. 그들은 무력해 보이기도 했고 두려움에 덜덜 떨기도 했다. 도살 당하기 전에는 장이 깨끗해야 하기 때문에(곱창, 순대 제작을 위해) 그들은 며칠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우리가 건네는 깨끗한 물과 감자를 그들은 놓칠 새라 열심히 받아먹었다. 이렇게 생생히 살아 있는 존재가 곧 저 피가 낭자한 건물만 통과하면 시체로 나올 것이라니, 믿기지 않고 가슴이 아파서 난 주저앉아 버렸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무수한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날 이후로 육식당이나 “고기”를 보면 비질 때 본 얼굴들이 필연적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 얼굴들은 나에게 “나를 죽이지 말라”, 더 나아가 “나를 죽이는 이 세상에서 나를 구해달라”고 도덕적으로 명령하였다. 고통과 공포에 질린 눈과 상처가 만연한 그들의 몸을 떠올리니 도저히 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비인간 동물이 나에게 부여한 윤리적 책임을 지어야 할 주체는 바로 나였다. 동물해방, 그것이 나의 미래가 되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파니 핑크가 말한 “눈이 있는 동물은 먹지 않아요”라는 말은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과 결을 함께 한다. 하지만 전자가 후자로 직접적으로 연결되려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관계 맺음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의 이들은 그 어떤 시대보다 육식을 많이 하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는 알아차리기 힘든 구조 속에 있다. 삼겹살을 먹을 때, 평생을 스톨에 갇혀 산 돼지의 얼굴이 함께 나오는가? 우유와 치즈를 즐길 때 젖에 고름이 끈덕지게 달라붙을 정도로 착취 당한 암소의 얼굴을 상상한 적이 있는가? 치킨을 먹을 때, 부리가 잘린 닭의 얼굴도 함께 나오는가? 치킨을 시켰더니 닭의 얼굴 조각이 나와서 징그러워서 못 먹겠다고 가게에다가 항의를 한 사례를 SNS에서 본 적이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타자의 얼굴, 거기다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을 보기 싫어한다. 피하려고 애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직면해야 한다. 기꺼이 그 직면을 감수해야 한다.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곧 윤리적 삶이기 때문이다. 공존의 지구에서 모든 이들이 자신의 식탁 위에 올라온 “음식”, 아니 “동물 사체 조각”에서 그들의 눈망울과 얼굴, 몸을 떠올리길 바란다.

 

 

 

 

더불어 나는 “눈이 있는 동물은 먹지 않아요”라는 대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이때 파니 핑크가 말하는 “눈”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닮은 눈을 의미하는 것인가? 인간이 정의한 눈만을 취급하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고찰해 본다면, 인간이 볼 때, 눈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감각 기관을 가지고 있거나 눈이 없는 동물은 먹어도 되는 것일까? 이런 면에서 위 대사의 맹점을 발견할 수 있다. “눈”이라는 특정 감각 기관으로만 한계 지어지는 이 선언은 심히 인간 중심주의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선언은 더 적극적인 비건 실천이나 동물권 인식/행동으로 곧장 이어지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실제 영화에서도 파니 핑크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동물은 죄책감이나 윤리적 고찰이 부재한 채로 소비한다. 닭알, 소젖은 물론이고 조개까지. 그에게 특정 “음식”을 먹을 것인가, 먹지 않을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유일한 기준은 인간이 정의한 “눈”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눈”을 둘러싼 기준은 매우 주관적이며 인간 중심주의적이다.

 

나는 파니 핑크가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 닭알(계란)에서 평생을 A4 종이보다 작은 철장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산 닭의 눈을 떠올리길 바란다. 소젖(우유)에서 자신의 젖을 자신이 낳은 아기에게 먹이지 못하고, 아기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눈을, 그 안에 담긴 비통함을 상상해 보길 바란다. 아기를 향해 아무리 절규해도 돌아오는 것은 전기 충격기임을 알고 통증에 확장된 눈을 응시하기를 바란다. 비록 조개가 우리가 생각하는 “눈”이 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인간 동물이 얼마나 많은 생명체와 지구에서 공존하며 살고 있는지 깨닫길 바란다. 그에게 더 이상 “눈”의 의미가 글자 그대로 “눈”이 아니라, 더 확장되어서 그의 선언이 동물해방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모든 존재 –언제든 죽음에 처한 타자가 될 수 있는-가 다른 타자 얼굴을, 즉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타자의 눈, 타자의 얼굴, 타자의 몸을 끈질기게 바라보자. 그들의 얼굴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그에 응답하자.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고 싶은 욕구와 생명으로 꿈틀거리는 그들의 몸이 죽음의 컨베이어 벨트로 끌려가기 전에 우리는 그들의 요청을 직시해야 한다.

 

나를 죽이지 마라
나를 죽이지 마라 

 

나를 죽이지 마라

 


글쓴이: 토란

책에 파묻혀 사는 비건 퀴어 에코 페미니스트.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사랑스러운 존재들과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 존재의 평화를 바라며 글을 읽고 쓰고 목소리 내고 있습니다. 현재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제주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평화, 동물권, 페미니즘, 환경, 퀴어 등 온갖 경계를 넘나드며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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