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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고양이한테 서운하면 안 되나요?

Contents/Living together with [ ] | [ ]와 함께

by SOURCEof 2023. 2. 2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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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고있는 고양이 철종이와 미요는 하루 네 번, 8시와 1시에 밥을 먹는다. 아침 8시는 동거인이, 새벽 1시는 내가 밥을 주기로 정해져 있고, 그 외의 시간은 자유롭게 여유 되는 사람이 챙겨주는 방식이다.

 

철종이는 항상 1시간~30분 전이면 온 집을 돌아다니고 상자를 핥으며 배고픔을 호소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철종이는 7시 30분부터 집을 돌아다니고, 웬일인지 미요도 같이 어수선을 떨고 있었다. 어수선함에 눈을 뜬 내가 일어나 앉자 둘은 나를 둘러싸고 빤히 쳐다보며 무언 시위를 펼쳤다. 

 

 

미요(왼쪽), 철종(오른쪽)

 

 

바로 옆에 아침밥 담당이 있음에도 나에게 보채는 둘이 귀여우면서도 난처했다. 난 더 자고 싶은데. 그리고 오늘 밥은 8시 30분에 나올 텐데. 아침잠이 부족한 동거인이 밥시간은 30분씩 미루기로 한 첫날이었다. 결국 동거인을 재우고 밥을 챙겨주기로 했다. 하나면 몰라, 둘 다 이러니 이길 수가 없었다. 

 

미요와 철종이는 각각 키튼사료와 다이어트 사료로 따로 주고 있어서 밥시간마다 서로 밥을 뺏어 먹지 않는지 감시해야 한다. 몇 번 서로의 밥맛을 보더니 이젠 뺏어 먹으려 용을 쓰고 있다. 하루 네 번 배식을 하고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는 일은, 하루 총시간으로 따지면 30분도 안 걸리지만 생각보다 지루하고 피곤한 일이다. 

잠을 잘 때 고양이 둘은 꼭 내 발치 이불 위에 자리를 잡고 잔다. 철종이는 평소 주 보호자인 동거인의 껌딱지이면서 내 이불이 좋은지 잠은 나와 함께 잤다. 고양이들은 동그랗게 말린 자세로 자다 갈수록 대자로 뻗어 자니 아침이면 내 자리는 침대의 반도 안 될 때가 많다. 아직 둘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 밤사이 싸움하곤 해 자다 일어나 중재하는 일상을 보낸다. 

 

밥을 챙기고 함께 잠을 자고 매일 화장실을 치우고 놀이시간을 챙기는 일들은 고양이와 함께 살기로 선택한 사람이 응당 챙겨야 하는 기본적인 업무이고, 함께 책임져줄 사람이 있으니 훨씬 수월한 일상이다. 그런데 최근 동거인이 학원에 다니느라 바쁘고 감기로 고생해, 나의 부담이 조금 늘었다. 누구든 하면 되는 일이니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가 최근 철종이가 늘 나오던 마중을 나오지 않고 동거인만 졸졸 따라다니니 서운함이 몰려왔다. 

 

사실 이런 서운함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찾아오는 이벤트다. 그럴 때면 동거인을 향해 ‘아이고 아이고 맨날 똥 치우고 밥 챙이고 구석에서 자면 뭐 하나! 다들 (동거인)만 좋아하는데! 난 그냥 쓸모를 이유로 존재하는 인간이지!’ 땡깡을 부리고, 그럼 동거인은 ‘뭐야 누가 그랬어! 철종이가 그랬어? 얘들아 왜 그랬어?!’ 따위의 대사로 장단을 맞춰준다. 고양이에게 서운함을 토로 해봤자 고양이 괴롭히기밖에 되지 않으니 인간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감정 해소를 한다. 그러고는 또 불편한 자세로 함께 잠을 자고 이뻐죽겠다며 눈을 맞추고 엉덩이를 두들기는 일상을 보낸다. 

 

동물과 함께 살며 생기는 서운한 마음은 인간이 정서적 거리 조절을 못 해 생기는 마음이라 생각한다. 일방적인 유대감으로 동물에게서 어떠한 정서적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건, 평소 쌓인 스트레스가 왜곡된 형태로 나오는 것이건, 결국 동물과 함께 살아가길 선택한 이상 스스로가 감내해야 하는 마음일 것이다. 난 오늘의 마음을 ‘생리 전 증후군으로 인한 어긋한 감정 표현’으로 해석했다. 고양이도 언제든 사람과 거리를 둘 수 있고 그 이유를 인간이 알 수도,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기에 언제나 고양이의 거리감에 맞춰야 한다. 

 

고양이가 독립적 성향을 가진 동물이라 좋다면서도 ‘개냥이’, ‘무릎냥이’ 같은 수식어를 붙여 인간의 만족도를 채워주는 행위를 하는 고양이를 가치 있게 여기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동물을 아끼는 마음, 대상화, 정서적 거리 조절은 분리해서 고민해야 하는 영역이고 이것을 유지해 나가는 일까지가 동물의 동거인으로서 실천해야 할 덕목이 아닐까? 고양이가 내 소유물이 아니고 질 높은 삶을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하는 존재. 세상에서 고양이를 ‘주인’으로 보호자들을 ‘집사’, ’캔따개’ 따위로 부르지만, 고양이들에게 어떠한 선택권도 없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고양이는 보호자와 그의 집에 소속된 것만으로도 인간을 위한 모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오늘 나는 전혀 이롭지 않은 땡깡을 부렸고, 그걸 받아준 동거인과 소란스러움을 견뎌준 고양이들에게 감사와 미안함을 느꼈다. 고마움과 즐거움도 좋지만 미안함을 가장 많이 느끼길 원한다. 

 

‘더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해’

‘좀 더 해박하지 못해서 미안해’

‘더 원하는 데로 못 해줘서 미안해’

‘우리랑 살기 위해 많은 걸 견디게 해서 미안해’

미안함은 더 나은 우리의 삶을 위해 노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글의 제목처럼 사람은 고양이에게 서운함을 느끼면 안 되는 것일까? 나는 ‘안 된다’로 답을 내린다. 그렇다고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이 잘못된 일이냐 묻는다면 그것 또한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감정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동거 동물의 보호자가 감정까지 완벽하길 요구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노력은 할 수 있기에 서운함이 든다면 스스로에게 서운하기로 했다. 나를 더 편히 느끼지 못하게 해서 미안하고 괜스러운 서운함을 느껴 미안하고, 그 미안함을 돌아보고 원동력으로 삼기로 하자. 

 

앞으로 우리는 더 나아질 것이다.

 

 

글쓴이: 남이사

비건으로 살아가길 선택한 사람.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자 한다. 현재는 비건요리, 비건수공예를 중점으로 생활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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