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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철수는 어디로 갔을까

Contents/pose problems | 문제제기

by SOURCEof 2022. 12. 31.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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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명절에 시골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름은 그대로였다. ‘철수’(가명)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그 집을 거쳐간 많은 개들을 지칭해온 것이다. 이름만 남긴 채 사라진 개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각기 다른 존재지만 하나의 이름으로 뭉뚱그려지는 동안 그 개들 고유의 정체성은 사라졌다. 그저 왈왈 짖으며 대문 경비를 서다가 개장수에게 팔려나가는, 그런 역할을 했으리라.

 

 

 

올해 초부터 시골에 귀촌하여 살며 마을에 여러 종류의 트럭들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택배 트럭, 돼지 트럭, 가축분뇨 이송 트럭, 재활용품 이송 트럭, 고물상 트럭, 건설물자 트럭, 그 외 마을 농부들의 트럭 등. 그런데 한 달 전쯤 한 트럭이 확성기로 녹음된 음성을 뿜어내며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염소~ 개~ 삽니다. 염소~ 개~ 삽니다 ···․’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들어도 ‘개’가 아닌 다른 단어 일리는 없었다. 개장수들이 시골을 돌아다니며 개를 사는 일들이 아직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구나.

 

나는 공장식 축산업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7년째 육식문화를 반대해오고 있지만, 나라의 법이 어느 종을 먹고 안 먹고를 정해주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에 육식을 덜 하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개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던 터인데,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꽤나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중년 부부처럼 보이는 운전자들이 몰고 있던 트럭은 0.5톤 크기 정도에 검은색 부직포로 덮인 네모난 철 케이지가 뒤에 딸려 있었다. 염소인지 개인지 모를 한 마리의 동물이 그 안에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마을에서 언젠가부터 사라진 두 마리의 개가 생각이 났다. 논으로 가는 길, 내가 지나갈 때마다 목줄에 팽팽하게 묶인 채로 반갑다는 듯이 번쩍번쩍 뛰며 반응하곤 했다. 그 둘은 높은 확률로 개장수에게 팔려가고, 고통 속에 살해되어 인간동물의 입 속으로 들어갔겠지.

 

 

©헤드라인제주

개를 향한 시골사람들의 야박한 인심을 탓해야 할까. 주 소비층인 시골 외곽 사람들을 탓해야 할까. 개를 파는 시골 사람들을 마냥 비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을 일상처럼 목격하는 시골에서 본인이 먹는 것을 본인이 책임지는 일과, 육체노동이라면 질색을 하는 도시에서 생산과정은 배제한 채 음식으로만 마주하는 일 중 어느 것을 옳다 그르다 할 수 있을까.

 

개고기에 대한 최근의 여론조사들을 살펴보면, 평소에 개고기를 즐기지 않는 20대들이 개고기 법적 금지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개개인의 먹을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왜 고기로서 소비되는 존재들의 죽음을 직접 목도하지 않아도 되었는가. 바쁜 현실을 아등바등 살아가며 먹을거리를 돌아볼 시간적 경제적 여유조차 없다 하지만, 정작 누군가의 삶과 죽음이 갈리는 중요한 현실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글쓴이: 다님

다양한 사회문제를 주제로 글을 쓰고 영상물을 만듭니다. 비거니즘(채식) 주제의 책을 만드는 1인 출판사 ‘베지쑥쑥’을 운영 중이며, 공장식축산업과 육식문화를 주제로 한 단편 다큐멘터리 <여름>을 연출하였습니다. 현재 생태적 자립을 위한 귀농을 하여 경남 밀양에 거주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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