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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값보다 더 비싼 약값

Series/장애 ---- 동물

by SOURCEof 2023. 1. 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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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총 13마리의 햄스터를 키운 이야기를 해보겠다. 사실 고해성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햄스터를 키웠다. 처음 햄스터를 만난 곳은 동네 롯데마트에 있는 ‘애완동물 코너’였다. 엄마와 아빠를 졸라 그곳에서 나는 좁아터진 케이지 안에 뭉쳐져 있던 수십 마리의 햄스터 중 두 마리를 골랐다. 각각 3천 원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 집에 오게 된 하양이와 까망이는 곧 새끼 햄스터를 9마리나 낳았고, 그 새끼들은 내 친구들 집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서로 싸우다가 죽은 햄스터들도 많았다. 보내지 못한 새끼까지 감당하기 어려웠던 우리 가족은 결국 산에 아빠 햄스터 하양이와 새끼를 풀어버린다. 죽인 거나 다름없었다. 그 햄스터들이 야생의 산에서 어떻게 살아남았겠는가. 당시 나는 자유로운 곳으로 햄스터들을 풀어준다고 자기 합리화를 했다. 그렇게 나는 생명을 해한 죄책감을 애써 비껴가면서 ‘인간’으로 성장했다.

 

 

 

 

집에는 엄마 햄스터 까망이와 푸딩이 남았다. 커가면서 점점 덩치가 산만해졌던 푸딩은 노쇠해진 까망이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까망이를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서 까망이의 얼굴에 피가 나기까지 했다. 코에 난 까망이의 상처는 다행히 딱지가 되었지만 하필 그 딱지는 콧구멍 근처에 자리 잡았다. 안 그래도 아픈데 호흡까지 어려워진 까망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이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차갑게 굳어있었다. 그 사실을 발견하고 한 당시 나의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까망이가 곧 죽을 것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순간 까망이의 시체를 본 나는 그리 슬프지 않았다. 심지어 동네 친구한테 전화를 걸어 약간 웃으면서 –일상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을 말하듯이- 까망이가 죽어있었다고 알렸다. 왜 나는 그때 슬프지 않았을까? 억지로라도 슬픈 척을 하고 애도를 하지 않았을까?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한 까망이의 죽음은 그저 쓰레기를 버리듯 거칠게 다루어졌고, 난 그 시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까망이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 문방구에서 뽑기를 했는데 처음 도전을 하자마자 ‘상품’이 당첨되었다. 그 ‘상품’은 바로 새끼 햄스터였다. 햄스터는 플라스틱 곤충 채집통에 드문드문 깔려 있는 톱밥과 약간의 사료 위에 놓여있었다. 나는 단 한 번에 내게 당첨된 그 햄스터를 보고, 나와 햄스터가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건 운명이 아니었다. 그저 자본의 논리로 함부로 ‘생산’되고 값싸게 ‘판매’되는 무수히 많은 ‘상품’ 중 하나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내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설사 이를 운명이라고 부른 다해도, 햄스터에게 이는 ‘불운’이라고 불려 마땅할 것이다.

 

그렇게 또 우리 집에는 애기라고 불리는 햄스터가 들어왔다. 이렇게 손쉽게 새로운 햄스터를 획득할 수 있으니 까망이의 죽음이 그다지 충격도 아니었지 않았을까? 이즈음에 푸딩의 귀는 곪기 시작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귀가 빨갛게 붓기 시작하더니 염증과 고름이 생기고 흉측해졌다. 푸딩이 가엽고 걱정되었던 나는 푸딩을 자전거 바구니에 태워서 동네 동물 병원에 찾아갔다. 동물 병원은 이름과 다르게 모든 ‘동물’을 치료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동물’은 개와 고양이만 뜻하기 때문이다. ‘가축’은 우리 식탁에 올라올 음식 재료이기 때문에 ‘동물’로 여겨지지도 않을 것이다. 요즈음엔 햄스터와 같은 소형 동물을 다루는 병원도 생겼다고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동물 병원에서 말하는 ‘동물’의 의미는 협소하다. 다행히 그때 내가 방문했던 동물 병원 의사는 걱정 어린 얼굴로 작은 햄스터를 데리고 온 초등학생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는 푸딩을 섬세하게 진찰한 후 연고를 발라주고 항생제를 처방해 주었다. 집에 돌아와 나는 며칠 동안 그 약을 사료와 섞어주었지만 결국 푸딩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렸다. 이후 애기도 어느 날 탈출을 해서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애완동물보다는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구경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바빴다. 우리 집은 더 이상 햄스터를 키우지 않았다.

 

 

 

 

아픈 푸딩을 동물 병원까지 데려가고, 햄스터 몸값보다 더 비싼 약 값을 지불하면서 어릴 적 나는 어느 정도 도덕적 오만함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이전에 햄스터를 버리고 방치한 사실은 까맣게 잊고 나는 키우는 동물을 위해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고, 책임을 보이는 사람이라면서 스스로를 대견해했던 것 같다. 어른들이 왜 ‘그깟’ 햄스터에게 돈을 쓰냐고 놀라워하는 모습을 속으로 비난하면서 말이다. 당시 내가 푸딩을 치료한 건 잘한 일은 맞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애완동물’(일부러 이 표현을 사용한다)이 아프거나 장애를 가졌을 때, 그들에게 치료나 돌봄을 제공하며 함께 쭉 살기보다는 어서 죽도록 방치하거나 유기하니까. 이런 사례는 소형 동물이나 ‘값싼’ 동물일수록 더 흔해진다. 아직도 햄스터 혹은 금붕어는 동네 마트에 가면 고작 몇 천 원으로 구입할 수 있다. 아무 준비 없이 돈을 주고 바로 데려오면 된다. 그렇기에 아프거나 장애를 가진, 즉 ‘상품 가치’가 떨어진 동물은 순식간에 ‘처리’(살해) 된다.

 

비록 당시 나는 푸딩을 포기하고 다른 햄스터를 사서 키우지는 않았지만 그때 생명을 대하던 나의 태도나 행동이 아프거나 장애를 가진 동물을 방치하고 버리는 인간들과 크게 달랐을까? 키우던 햄스터를 산에 버리고 온 나, 상처를 입고 상태가 점차 위급해진 까망이에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나, 까망이가 죽어도 슬픔조차 느끼지 못했던 나, 문방구에서 무책임하게 또 햄스터를 얻어온 나. 이제는 안다. 생명의 가치를 절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같이 사는 생명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한다고. 지금의 나는 동물권을 배우고 비거니즘을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기 전에 벌써 내가 많은 생명에게 고통을 주었음을 반성한다. 너무 늦게 알았지만,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고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으로부터 고통받는 동물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힘쓰고 싶다.

 

 

글쓴이: 토란

책에 파묻혀 사는 비건 퀴어 에코 페미니스트.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비건맛집을 탐방하고 사람들과 떠드는 것을 사랑합니다. 2년 전 가족이 되어준 뽀리와 동네에 묶여 사는 개 쫄랑이, 똘이와 매일 산책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 행복하고 존중 받는 지구를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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