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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다'는 왜 욕일까?

Contents/Reconceptualizing | 새로운 관점

by SOURCEof 2023. 1. 2.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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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운 세상’보다는 ‘개다운’ 세상을 그리며

 

우리 집 반려견 뽀리를 보고 있으면 내 눈이 초롱초롱해지고, 함박웃음이 광대 위로 올라온다. 뽀리는 하루 종일 바라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매일같이 감탄한다. 그 귀여움에, 총명함에, 발랄함에, 품위에, 부드러움에... 나에게 사랑과 환대를 주는 뽀리의 표정과 몸짓과 소리에... 뽀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이 나를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만든다. 나는 ‘개’인 뽀리가 참 좋다. ‘개다운’ 뽀리의 모습이 좋다. ‘개 같은’ 뽀리가 좋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개 같다’라는 말은 대개 욕설의 의미로 통한다. 실제로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개 같다’의 뜻은 다음과 같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데가 있다.” 개와 함께 산 이후로 이 표현에 의문이 들었다. 개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인데 왜 ‘개 같다’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것일까? 비슷한 예시는 수도 없이 많다. ‘개같이 맞았다’, ‘개 보다 못하다’, ‘개가 개를 낳지’, ‘복날에 개 맞듯’, '야수/괴물/짐승 같다' 등등... 접두사 ‘개’가 동물 ‘개’와 관련이 없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 언어를 사용하면서 동물 ‘개’를 자주 연상하고, 서서히 ‘개’의 이미지는 가끔 하찮고 부정적인 것으로 추락할 때가 있다. ‘개’뿐만 아니라 다른 비인간 동물들도 인간 동물의 종차별적 인식론을 통과하면서 ‘동물화’는 모욕과 수치, 차별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

 

 

 

 

여기서 나의 질문이 시작된다. 왜 비판할 거리를 표현하기 위해 비인간 동물을 끌어들이는가? 과연 ‘개 같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는 그 자체로 부정, 모욕, 폭력의 상징인가? 이런 상징은 누가 부여했는가? 어떤 존재에게 상징을, 정확히 말하자면 낙인을 부여할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 동물’로 태어났다면 그 권력을 당연하게 획득하는가?    

 

우리 인간 동물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그 권력은 당연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부당하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방식의 ‘동물화’가 무척 불편하다. 동물화는 아주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모욕의 의도를 전달한다. 그와 반대로 ‘인간화’, 그러니까 ‘인간다움’, ‘인간성’과 같은 단어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더 도덕적이고 깨끗하고 청렴하고 이성적인 것. 하지만 진정 ‘인간’이 그러한가? 난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존재가 '인간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뽀리가 우리 집으로 오기 전 뽀리를 방치하고 짧은 끈에 묶어두다가 파양한 것도 인간이다. 개를 포함한 수많은 동물을 가둬놓고 고통을 주고 살해하여 먹는 것도 인간이다. 동물을 끊임없이 임신과 출산의 도구로 만들어 그들의 삶과 재생산권을 착취하는 것도 인간이다. 동물을 실험 대상, 오락용, 화풀이용 등 인간 탐욕만을 위한 수단 취급하는 것도 인간이다. 비인간 동물 외에도 생태계에 인간이 끼친 해악은 언급할 수도 없을 만큼 무수하다.     

 

 

 

 

그런데 왜 끔찍하고 부당한 것을 말할 때 ‘인간’이 아닌 ‘동물’에 빗대어 표현하는가? 동물은 오히려 피해자이지 ‘동물화’되어 모욕의 수단으로 쓰일 대상이 아니다. 위에 언급한 속담이나 표현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동물을 경유하여 어떤 대상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 자신이 싫어하거나 낯선 존재가 동물, 야수 혹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외계인으로 표현될 때, 더 마음 놓고 그들을 욕하고 혐오할 수 있어진다. ‘개 같은 것들 싹 다 치워버려’, 이러면서 인간들은 상대방에 대한 폭력과 혐오를 한결 더 간편하게 수행한다. 서로 더 쉽게 미워하고 때리고 죽일 수 있도록 많은 갈등과 반목의 현장에서 ‘동물화’가 활용되고 있다. 상대의 얼굴을 나와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표현하고 상상하면 물질적으로는 가까운 거리일지라도 심리적으로는 엄청나게 먼 거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공감이입을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나와 완전히 다른 종이니까!") 이어서 그들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도 되는 존재라고 여길 수 있게 된다. 결국 이는 '동물화'가 가진 부정적인 상징, 낙인을 다시 강화시킨다.     

 

뿐만 아니라 나는 ‘동물화’가 폭력적이라고도 생각한다. ‘동물화’는 먼저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화'와 근본적으로 대척점에 서있다. 그리고 이 구도는 우리가 모든 생명을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으로 구분하는 데서 출발한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 이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결코 그 두 요소를 대등한 방식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전자가 후자보다 더 우월하고 가치 있다. 그렇기에 후자에 대한 전자의 폭력, 착취, 혐오, 배제는 정상화된다. 후자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도 마땅하다고 본다. 그러니까 지금 온 세계에서 공장식 축산, 동물 학대와 같은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아무도 그 부조리함을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잊힌 것의 목록에서도 잊힌 존재. 비인간 동물. 침묵 당하지도 않은 존재. 왜냐하면 애초에 발화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인간 동물은 언제나 인간 동물보다 열등한 대상이며 폭력과 차별의 자연스러운 대상이었다. 당연히 동물화된 인간 동물 또한 온갖 폭력에 노출되고 그들의 권리는 보장되지 못한다.     

 

“끊임없이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분하고 ‘비인간’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해온 차별적인 인식론과 폭력의 역사(김보경 문학평론가)”를 똑바로 바라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동물이라는 기표가, 동물화의 방식이 더 이상 모욕이나 낙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모든 생명은 달라 보여도 각자의 방식으로 희로애락을 느끼며 고통보다는 기쁨을 추구하며 살고자 한다. 더불어 우리는 다 연결되어 있는 존재 아닌가? 우리의 관계는 촘촘하고 끈끈하게 엮여있지 않은가? 그 어떤 존재도 위계적인 이분법적 구조 안에 갇히지 않는다. 특정 대상을 혐오하기 위해(참고로 이 목적은 그 자체로도 이미 잘못되었다) 혹은 부당한 폭력을 비판하기 위해서 ‘동물화’ 방식을 써야 하는가? 오히려 나에게 혐오나 폭력은 너무도 ‘인간적’이어서 두렵고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폭력과 차별, 전쟁이, 자연 파괴와 살생이 ‘개 같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지극히도 ‘인간 같은 것’이어서 우리가 그것을 경계하고 그것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다른 존재들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 모두를 포함하는- 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투쟁의 한 방식으로 ‘동물화’를 모욕과 혐오의 수단으로 쓸 것이 아니라 모든 종 간의 상호의존성과 포용력을 일깨우는 수단으로 재발명해야 하지 않을까.      

 

 

묶여있었을 때 뽀리 (구조 전)

 

다시, ‘개 같은 것’은 욕인가? 모든 폭력과 살상은 인간이 저질러놓고? 돌아볼 것은 우리 자신이다. ‘인간다움’이 정말이지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나 할까? 펫샵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동물을 샀다가 금새 질려버렸다며 생명을 유기해버리는 인간들이 널려있다. 유기동물 보호소에 말똥말똥하지만 슬픔이 가득한 개와 고양이들의 눈빛을 떠올려본다. 펫샵에 팔릴 ‘애완동물’을 만들기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평생 임신과 출산만 반복하다 죽는 번식용 암컷 개와 고양이의 고통을 헤아려본다. 로드킬, 동물 학대, 안락사를 당하는 수많은 동물들의 마지막 숨을 느껴본다. ‘인간답다’라는 말이 참으로 욕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이제 동물화의 폭력을 끝내자. 비인간 동물은 그 존재대로 비인간 동물일 뿐이다. 그들은 대상화되어 다른 인간 동물을 혐오하고 비난하고 차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답게 살고 있다. 왜 그들답게 사는 것을 말할 때 인간은 폄하의 의미를 주고받는가. 혐오와 차별, 모욕의 수단으로서의 동물화를 중단하자. 또 동물화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부조리를 비판할 수 있다. 더 깊은 성찰과 상상력이 필요할 때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존재도 혐오하고 누락하지 않은 서사와 표현을 발굴해야 한다. 사고방식이나 행동, 예술로든 ‘비인간’에 대해 당연시해오던 우리의 “차별적인 인식론과 폭력의 역사”에서 벗어나서 지구에 사는 우리 모든 종을 평등하게 바라보자. 우리 사이의 연결성을 회복하자. 오늘도 뽀리의 신난 발걸음을 바라본다. 나를 핥아주는 부드러운 혀. 복슬복슬한 털, 따뜻한 숨소리, 안정적인 심장 박동을 감각해본다. 이 세상이 ‘개다운’ 뽀리를 조금이라도 닮으면 얼마나 좋을까. 새삼스레 감사함이 밀려온다. 고로 나는 ‘개다운’ 세상이 더 좋다. 지금 ‘인간’이 가진 탐욕의 원리대로 돌아가는 ‘인간다운’ 세상보다는.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쓸 때 큰 영감을 준 소설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내가 겪은 모든 모욕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극복해 내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 그렇게라도 사는 건 좋다. 살아서 개 같은 것들을 쓰다듬는 것은 특히나 더 좋다. 개를 쓰다듬으면서, 개의 활력과 온기를 느끼면서, 어떻게 하면 그 인간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 개 같은 것을 쓰다듬는 것은 좋다. 개 같은 것들, 개 같은 것들, 개 같은 것들. 나는 그 말을 계속 되뇌었다. 되뇔수록 그 말은 내 속에서 박살 나고 뭉개져서 원래 통용되던 의미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다른 의미로 조합되었다. 나는 개를 쓰다듬었다. 개의 이름은 토리이고 토리는 아주 사랑스럽다. 그것이 아주 개답다고, 개 같다고 생각했다."
- 김지연, <공원에서>, <<2022 제 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2.

 

 

글쓴이: 토란

책에 파묻혀 사는 비건 퀴어 에코 페미니스트.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비건맛집을 탐방하고 사람들과 떠드는 것을 사랑합니다. 2년 전 가족이 되어준 뽀리와 동네에 묶여 사는 개 쫄랑이, 똘이와 매일 산책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 행복하고 존중 받는 지구를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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