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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가 먹을 감은 남겨주세요

Contents/Reconceptualizing | 새로운 관점

by SOURCEof 2022. 12. 31.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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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동물복지, 동물권, 비건과 같은 개념들이 서양에서부터 시작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로서 동물복지, 동물권, 비건은 과거부터 존재했다. 동물복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수많은 단어들 중 ‘까치밥’이라는 단어가 있다. 가을, 겨울철 감나무 끝에 달린 감을 동물들을 위해 따지 않는 관례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데, 그렇게 남겨진 감을 ‘까치밥’이라고 한다. 주로 까치가 감을 잘 쪼아 먹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고수레’라는 단어도 존재한다. ‘고수레’는 민간 신앙에서 산이나 들에서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음식을 먹기 전에 조금 떼어 던지면서 ‘고수레’라고 했다고도 하고, 옛날에 마음씨가 후덕한 고씨 성을 가진 지주가 소작인들의 사정을 고려하여 소작료를 줄여 주거나 면제해 주어 농민들이 특별한 음식물이 생길 때마다 고 씨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면서 ‘고수레’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 후로 농민들이 가을걷이할 때 벼 이삭 등 일부를 남겨두어 나보다 배고픈 주변 사람들이 거두어 갈 수 있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봄에는 깨어날 풀벌레들을 생각해 짚신을 느슨하게 했다고 한다.

 

5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국어(상) 교과서 및 7차 교육과정의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슬견설’도 존재한다. 슬견설은 고려 시대 쓰인 글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에 대한 깊은 생각이 담겨 있다.

 

 

    客有謂予曰昨晩見一不逞男子以大棒子椎遊犬而殺者勢甚可哀 不能無痛心自是誓不食犬豕之肉矣予應之曰昨見有人擁熾爐捫 蝨而烘者予不能無痛心自誓不復捫蝨矣客憮然曰蝨微物也吾 見庬然大物之死 有可哀者故言之 子以此爲對 豈欺我耶 予曰 凡 有血氣者自黔首至于牛馬猪羊昆蟲螻蟻其貪生惡死之心未始不 同豈大者獨惡死而小則不爾耶然則犬與蝨之死一也故擧以爲 的對豈故相欺耶子不信之盍齕爾之十指乎獨拇指痛而餘則否 乎在一體之中無大小支節均有血肉故其痛則同況各受氣息者 安有彼之惡死而此之樂乎子退焉冥心靜慮視蝸角如牛角齊斥 鷃爲大鵬 然後吾方與之語道矣

어떤 손(客)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저녁엔 아주 처참(悽慘)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어떤 불량한 사람이 큰 몽둥이로 돌아다니는 개를 쳐서 죽이는데, 보기에도 너무 참혹(慘酷)하여 실로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맹세코 개나 돼지의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이글하는 화로(火爐)를 끼고 앉아서, 이를 잡아서 그 불 속에 넣어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손이 실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는 미물(微物)이 아닙니까? 나는 덩그렇게 크고 육중한 짐승이 죽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한 말인데, 당신은 구태여 이를 예로 들어서 대꾸하니, 이는 필연(必然)코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대들었다.

나는 좀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무릇 피(血)와 기운(氣)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 말, 돼지, 양, 벌레,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찌 큰 놈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놈만 죽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즉, 개와 이의 죽음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큰 놈과 작은 놈을 적절히 대조한 것이지, 당신을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닙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당신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십시오. 엄지손가락만이 아프고 그 나머지는 아프지 않습니까? 한 몸에 붙어 있는 큰 지절(支節)과 작은 부분이 골고루 피와 고기가 있으니, 그 아픔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각기 기운과 숨을 받은 자로서 어찌 저 놈은 죽음을 싫어하고 이놈은 좋아할 턱이 있겠습니까? 당신은 물러가서 눈 감고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달팽이의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대붕(大鵬)과 동일시하도록 해 보십시오. 연후에 나는 당신과 함께 도(道)를 이야기하겠습니다."라고 했다.  

- 이규보(1169년-1241년)  

 

 

 

서구 사회의 철학자들이 개념을 정리한 동물권(animal rights)이 동물권의 의미로 소비되며, 그들이 동물권에 대한 개념을 확립했을 때가 동물권에 대한 개념이 생겨난 때로 통한다. 하지만 슬견설을 읽어보면 한국에서도 동물권 철학에 대한 담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규보의 동물권 철학은 현대의 동물권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재의 동물권 담론을 간단하게 ‘다른 존재라고 해서 차별해서는 안 된다.’ ‘종이 다르다고 하는 차별은 종 차별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규보의 슬견설 내용 중 ‘무릇 피(血)와 기운(氣)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 말, 돼지, 양, 벌레,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을 통해 현재의 ‘종차별’에 대한 개념을 약 800년 전 고려 중기 때 부터 이야기한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선조, 우리나라의 철학자들도 동물권과 동물복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해나갔다. 개화 이후 ‘진보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많은 것들이 ‘서구’ 사회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혔다. 이런 것을 철학적, 사회적 개념으로 ‘제국주의(imperialism)’라고 한다. 서구 사회는 철학적 개념과 수많은 역사를 자신들을 기준으로 만들었고 이를 번역해 전 세계에 퍼뜨렸다. 이 중 하나가 필자는 동물권이라고 생각한다. 동물권의 탈제국주의화가 필요하다.

 

현대의 ‘어른’을 담당하고 있는 산업화에 끼어 있는 베이비붐 세대들은 동물권에 대한 담론을 보며 ‘배불러서 그렇다’ ‘배고픈 시절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그렇다’ ‘나 때는 주는 대로 감사히 먹었다’라는 말을 종종 한다. 과연 산업화 전, 개화 전에는 어땠을까? 우리의 선조들도 배고프게, 가난하게 삶을 살았지만, 동물들에게 먹을 것을 양보했고 이는 착한 일이라고 사회에 보편적으로 생각되었다. 이런 관례와 우리 고유의 철학은 산업화와 함께 잠시 자취를 감추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고유의 철학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다. 추석 때 “까치가 먹을 감은 남기고 감을 따라”라는 어른 들의 말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문서로서 전해져 내려왔다기보다는 정말 입에서 입으로 간직해온 우리의 고유하고 소중한 철학이다. 올 추석 까치감 이야기를 들었는가? 그렇다면 이 말을 잊지 말고 당신의 조카 당신의 자녀에게 꼭 해주자. 입에서 입으로 우리의 철학을 간직해보자.

 

올 추석 먼지가 쌓인 제기를 닦았다면, 어쩌면 먼지가 쌓여있을 우리의 소중한 동물에 대한 철학도 잘 닦아 보자. 동물권과 동물복지 등과 같은 개념은 새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잠시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 고유의 문화이자 철학이다.

 

 


글쓴이: 누 

2012년부터 동물과 관련된 활동을 시작했고 생명과학과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시민단체 직원으로 2년의 시간을 보냈고 호주에서 2년의 시간을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방랑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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